'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아래와 같은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깨어 있다'와 '잠을 잔다'는 동전의 양면이다.
또렷이 깨어있음은 깊은 잠에서 기인한다.
깊은 잠은 또렷이 깨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깨어 있음'의 가치는 '잠'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다.
접속의 가치는 단절에 의해 완성된다.
"삶이란 뭘까요?"
내가 물었다.
"그냥 이런 거지," 라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어있는 거야. 잠에서 깨어나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고.. 또 오줌을 누는 거야. 잠을 삶의 일부라 생각하는 건 커다란 착각이야. 잠은 분명히 죽음의 영역이라구. 즉 죽어 있는 인간들이 잠깐 잠깐 죽음이란 잠에서 깨어나곤 하는 거야. 그게 삶이지."
내가 물었다.
"그냥 이런 거지," 라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어있는 거야. 잠에서 깨어나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고.. 또 오줌을 누는 거야. 잠을 삶의 일부라 생각하는 건 커다란 착각이야. 잠은 분명히 죽음의 영역이라구. 즉 죽어 있는 인간들이 잠깐 잠깐 죽음이란 잠에서 깨어나곤 하는 거야. 그게 삶이지."
'깨어 있다'와 '잠을 잔다'는 동전의 양면이다.
또렷이 깨어있음은 깊은 잠에서 기인한다.
깊은 잠은 또렷이 깨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깨어 있음'의 가치는 '잠'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다.
접속의 가치는 단절에 의해 완성된다.
단절이 없는 접속은 불면의 밤을 끝없이 헤매는 것과 같다. 확실한 단절이 있어야 접속감은 극대화된다. 깊은 잠과도 같은 단절이 충만할 때 접속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접속을 즐길 수 있으려면 단절의 감미로움을 맛볼 줄 알아야 한다.
손자병법 兵勢(병세)편의 말미에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온다.
故善戰人之勢, 如轉圓石於千仞之山者, 勢也. 고선전인지세, 여전원석어천인지산자, 세야.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의 싸움의 세는 마치 둥근 돌을 천 길이 되는 급경사의 산에서 굴러 내려가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곧 세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의 싸움의 세는 마치 둥근 돌을 천 길이 되는 급경사의 산에서 굴러 내려가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곧 세다.
접속을 즐기면서 단절을 살짝 그리워하고 단절을 즐기면서 접속을 살짝 그리워하는 자는 접속-단절의 勢(세)를 향유하는 자이다. 접속과 단절은 결국 하나라는 것. ^^
최근댓글